"고마 사는 기, 배우는 기 와 이리 재밌노!”
「칠곡 가시나들」은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형 영화입니다. 칠곡늘배움학교(문해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그린 영화로 잔잔하게 할머니들의 일상을 보여줍니다. 세월이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투박한 손으로 꾹꾹 눌러쓴 몇 줄 안 되는 글에는 팔십줄 인생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칠곡 할머니들은 작은 시장 골목을 거닐며 식당 간판, 메뉴를 또박또박 읽는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모습이지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에게 세상이 넓어지듯, 할머니들의 세상은 한글을 배우면서 넓어졌습니다. 찬찬히 둘러보다보니 맨날 오던 시장의 곳곳이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한글을 배우고 나서 자랑을 하고 싶지만 자랑할 데가 없다며 남편을 그리워하는 할머니, 사정없이 떨어지는 폭포를 보며 살아생전 다시 올 일이 있겠냐며 마지막 인사를 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며 당신들의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다 설명문을 읽으며 공원의 운동기구를 사용하고 손주와 마주 앉아 한글공부를 하는 모습이 나오니 인생 막바지에 상반되는 감정선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한글선생님과 함께한 소풍에서는 수다를 떨고 게임을 하는 할머니들은 ‘가시나’로 돌아가 한없이 즐거워 보입니다. 이제 막 인생의 재미를 느끼는 순간순간들이 매우 가치 있고 소중한 순간이 됩니다.
바쁘고 험난하게 살았던 할머니들은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글을 배우고 나서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시가 천지삐까리라는 할머니를 보며 얼마나 작은 세상 속에서 살았을지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칠곡 할머니들을 그저 한글을 배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학예회를 갓 마치고 나온 핑크빛 볼터치를 한 할머니들
‘인문학 도시 칠곡을 들어보셨나요?’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칠곡군은 이미 ‘인문학도시’로 유명한 곳입니다. 칠곡군은 2013년부터 인문학 도시사업을 확장시켜 평생학습 도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25개의 인문학 마을 사업반장이 ‘칠곡인문학마을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특이한 점은 마을이 조합원이라는 것입니다. 마을공동체가 활성화되는 흐름에, 벤치마킹을 하러 칠곡군을 방문하는 지자체도 많다고 합니다.
2019 칠곡 인문학마을 결과공유회에서는 사례 중심으로 다양한 내용이 공유되었습니다. 행사는 마을살이 유형별 발표, 실무자가 생각하는 인문학마을 특성화사업 평가, 마을문화콘텐츠 개발 사례발표, 주민 축하 공연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칠곡 인문학 마을은 공동체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고 공동체를 통해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을 다년간의 노력으로 이루어 내었으며 계속해서 그 가치를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칠곡군이 인문학 도시로 성장해감에 따라 평생학습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기반이 잘 다져져 있기 때문에 할머니들도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것입니다.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의지가 있어도 실행시키기가 매우 어렵지만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면 첫 시작은 훨씬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노인회관에서 할머니들 숙제 검사를 하고 있는 주석희 선생님
‘때로는 친구 같고, 때로는 딸 같은 선생님’
공동체에서 환경이 갖춰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칠곡가시나들에서는 일곱 명의 할머니들을 챙기고 이끌어가는 한글 선생님이 바로 이 역할을 합니다. 리더는 구성원들을 파악하고 함께 호흡하며 지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주장만으로 공동체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의견에 공감하며 공동체의 활동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리더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선생님은 한글을 가르치고 숙제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 소풍을 가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수업시간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로 할머니들과 노인회관에 모여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선생님과 수업 날이 아닌데도 할머니들의 집을 방문하여 잘 계신지 밥은 먹었는지 묻고 돌보며 정서적으로도 깊은 유대감을 쌓았습니다. 할머니들과 선생님은 나이 차이를 잊을 정도로 잘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한글 선생님으로써 자기 직무에 대한 역량과 함께 할머니들의 리더로써 포용력과 의사소통능력, 신뢰 등을 고루 갖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왼쪽부터 안윤선, 강금연, 김두선, 박월선, 이원순, 박금분, 곽두조 할머니
‘열여덟 소녀로 돌아간 할머니들에게서 공동체의 모습을 엿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일곱 명의 할머니들을 공동체 구성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을 공동체는 주민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는데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우고자 하는 공동의 목적이 있었고 한글을 배워 여생을 더욱 재미있게 사는 것이 목표라고 하였습니다. 이 목표를 위해 노인회관은 공부하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다른 할머니들과 모여 함께 공부를 함으로써 서로에게 힘이 되고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칠곡 할머니들 시절엔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던 때였고 더군다나 일제강점기였으니 학교에 갈 엄두를 못 냈을 것입니다. 할머니들은 어린 나이에 일찍 시집을 가 ‘어머니’라는 무게를 짊어지고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인생이었습니다. 팔십줄이 되어서야 한글을 배울 기회를 찾았고 인생의 재미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며 수업을 듣고 숙제를 하고 학예회에 참석 해 그간 노력했던 것을 보여주는 자리에 가기까지, 혼자였다면 외로워질 때도 있었을 것이고 이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할머니들이 함께 모여 한글을 배우고 활용하는 모습을 보며, 할머니들의 행복도가 올라가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들이 모여 한글을 배우며 인생이 즐거워진 모습은 공동체의 필요성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고령화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소통이 단절된 외로운 삶을 살고 있는 노인들이 증가했습니다. 서로 살뜰히 챙기는 이웃들이 많았던 과거에 비해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는 것이 현대사회의 모습입니다. 적막한 집에서 혼자 하루를 보내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아닌, 밖으로 나와 소통하고 함께 활동하는 공동체적인 모습을 할머니들의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칠곡 할머니들을 보며 다시 한번 마을공동체 활동이 왜 필요한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공동체는 우리의 일상 속 가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을의 경제적인 활성화를 위해 공동체가 필요할 수도 있고 마을의 다양한 문제들을 발 벗고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 활동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필요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을 안에서 내가 주체가 되어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일, 육아, 소통 단절, 어떤 이유로든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공동체가 ‘나’를 표현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