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일 금요일 11시 30분.
당시 나는 마을공동체를 지원하기 위한 현장컨설팅을 다니고 있었다.
오늘 방문하기로 한 곳은 고성군에 있는 해상2리.
해상2리 마을공동체는 2017년 해당 사업을 신청하여 올해 2년째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1년 차 해상 2리의 사업계획서에는 마을 내의 유휴지를 이용한 메밀경작이 주요한 사업이었다.
마을 내에 남아도는 흉물스런 유휴지를 활용해 메밀을 재배하여 소득을 창출해 보자는 목적에서였다.
흔히 볼 수 있는 농촌 마을의 공동체 사업계획서였다.
그러나 우리는 메밀경작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경작을 하는 것만으로는 해상2리 마을공동체가 활성화되기에 부족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몇 차례 논의를 거듭한 끝에 메밀을 경작하고 이를 활용하여 주민들이 즐길 수 있는 마을 축제로 발전하였다.
그러니까 유휴지를 이용한 메밀 경작과 여기서 생산된 메밀을 가지고 막국수를 만들어 주민들이 축제로 즐길 수 있는 자원순환형 마을공동체 사업계획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이전부터 해상2리 마을 주민들이 요청해 왔었지만 번번이 거절하였던(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점심을 함께 하기로 한 날이었다.
원래는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1시 30분에 찾아뵐 생각이었지만 이장님과 주민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12시로 시간을 변경했던 것이다.
점심을 함께 먹는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내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일이었다.
그냥 점심도 아니고 마을 주민들이 농사를 지어 직접 수확한 메밀을 가지고 마을 회관에서 막국수를 만들어 먹는 행사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순한 밥 한끼가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직접 수확한 농작물로 막국수를 만들어 먹는 약간의 잔치였던 셈이다.
나는 약간의 기대 속에 해안도로를 따라 자동차를 운전했다.
정오가 조금 못 미쳐 마을 회관에 도착하자 이장님과 주민들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마을 회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많은 주민들이 나와 계셨다.
현장 컨설팅을 한다고 해서 우리는 컨설팅 미팅을 예상했지만 이장님과 주민들은 마을잔치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마을잔치를 준비하고 계신 주민들>
이장님은 마을 회관의 뒷문을 열고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신다.
무언가 하고 호기심에 들여다보았더니 이상하게 생긴 덩어리였다.
이게 바로 오늘 점심의 주요 메뉴가 될 것이라고 한다.
주민들 손으로 직접 농사지어 수확한 메밀로 만든 메밀 반죽이었다.
이것으로 오늘 점심 메뉴인 막국수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이장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주민들이 달려들어 그릇 속에 있는 메밀 반죽을 모두 수거해갔다.
잠시 후 메밀 반죽은 끓는 가마솥 위에서 기계에 눌려 국수가 되어 솥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서도 뚝딱, 저기서도 뚝딱.
주민들은 바쁘게 마을잔치를 준비하셨다.
익숙한 듯 주민들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잠시 후, 모든 준비가 끝나고 마을 회관에 주민들이 둘러앉아 막국수 잔치가 시작되었다.
현장컨설팅을 왔는데 마을잔치가 되어 버렸다.
부녀회원님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나는 그날 막국수를 두 그릇이나 먹어야 했다.
막국수에서는 메밀 특유의 고소함과 거친 맛이 느껴졌다.
이 동네에서 오래 전부터 해 먹었던 전통 방식이라 맛도 내가 이전까지 먹었던 막국수와는 다른 맛이었다.
이전 컨설팅에서 막국수를 만드는 방식에 대한 연구와 예전 방식에 대한 복원을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주민들이 착실히 이행한 모양이다.
위에서 소개한 해상2리 마을공동체에서처럼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은 첫째도 둘째도 주민이 즐거워야 한다.
해상2리 마을공동체라고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을 축제를 얘기했을 때 주민들은 관광객부터 떠올렸다.
관광객들을 끌어들여 마을 축제를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과감하게 시선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돌렸다.
마을 주민들이 즐거운 축제, 마을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축제, 마을 주민을 위한 축제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마을 내에서의 선순환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우리 손으로 경작한 메밀을 우리가 소비하고, 우리가 즐길 수 있도록 마을 내에서 소화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방안들이 축제였고 겨우내 막국수 잔치였다.
농사가 끝난 농촌에는 긴 겨울이 있었다.
이 긴 겨울 동안 주민들이 농사로 수확한 메밀로 막국수를 만들어 잔치를 벌여 함께 나눠 먹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메밀 경작이 축제로 연결되고 마을 잔치로 이어졌다.
마을 순환형 경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2019년 9월 19일 오후 3시.
나는 강원도 정선에 있는 고한읍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잠시 후에 고한 바샅이라는 마을공동체와 미팅을 할 예정이었다.
고한 바샅은 고한읍 시장을 중심으로 결속된 마을공동체였다.
상인들과 주민들이 의기투합하여 침체된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시장 골목을 바꾸고 싶어 시작한 공동체였다.
잠시 후의 만남은 하반기 현장컨설팅의 일환으로 만나는 것이다.
마을공동체를 위한 현장컨설팅은 상반기와 하반기 1년에 2번 이루어진다.
미팅 시간을 기다리며 나는 고한읍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아직은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시장을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시장 골목을 구석구석 돌아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몇 개월 전에 둘러본 고한읍 시장 골목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었다.
전통시장 골목 하면 의례히 떠오르는 어둡고 지저분한 골목길이 변한 것이다.
위의 사진에서처럼 골목길의 분위기가 확 바뀌어 있었다.
골목이 환해지고 마치 숲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시장 골목을 돌 때마다 감탄은 계속되었다.
가게 앞마다 골목마다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다.
이 야생화들은 함백산에서 자생하는 야생화들이다.
함백산에서 자생하는 다양한 야생화들을 배양하여 골목 곳곳에 심어 놓은 것이다.
어둡고 칙칙했던 골목이 야생화 꽃밭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숲속에서 산책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과연 이곳이 내가 알던 그 시장 골목인가?
단 몇 개월 만의 변화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잠시 후 미팅에서 만난 마을공동체 회원들에게 나의 놀라움을 전해 드렸더니 활짝 웃으신다.
그들은 시장 골목의 변화보다도 자신들에게 더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실토했다.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을 추진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지역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 일을 추진하면서 느꼈던 즐거움과 행복감이 회원들의 내면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정작 바뀐 것은 시장 골목이 아니라 마을공동체 회원들의 자신감과 얼굴 표정이었다.
■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지역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모든 마을은, 모든 공동체는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다.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추진하면 된다.
어떤 마을공동체에게는 이 문제가 육아일 수 있고, 또 어떤 마을에서는 그것이 소득과 관련된 문제일 수 있다.
어느 마을공동체는 문화와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어느 마을에서는 밥상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을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공동의 문제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 추진 주체는 누구인가?
어떤 지원사업을 보면 리더 혼자서 사업을 추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 어떤 사업은 리더들 몇몇이 합심하여 사업을 추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마을공동체는 리더 혼자서 추진해서도, 리더들 몇몇이 추진해서도 안 되는 사업이다.
물론 사업 초기 어쩔 수 없이 리더 몇몇 분들이 사업을 끌고 가는 것처럼 불가항력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 사업 방식을 계속 고집해서는 곤란하다.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은 공동체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구성원 모두가 내 일처럼 생각하고 참여하며 함께 추진해 나가야 한다.
너 나 구분 없이 마을공동체가 내 일이 될 때, 성공하게 될 것이다.
■ 실패해도 괜찮아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이 성공한다면 좋겠지만 모든 사업이 성공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을 수도 있다.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은 억 단위 이상을 지원하는 대규모 사업이 아니다.
우리는 하고자 하는 열의를 가진 공동체를 선별하고, 그 공동체를 지원하며, 그 공동체가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작은 규모의 지원사업이다.
성공을 한다면 좋겠지만 실패해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두려운 것은 실패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하고 나서 다시 도전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마을공동체를 도울 수 있다.
실패는 자산이며 실패를 통해 성공은 학습될 수 있다.
글쓴이 김 동 식(지역디자인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