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이야기] 마을공동체의 근본과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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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23-04-10
링크 https://www.eroun.net/news/articleView.html?idxno=31691

얼마 전까지 일하던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는 춘천의 마을공동체, 주민자치, 시민학교, 마을교육공동체를 지원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20여년 귀농해 살고 있는 춘천의 농촌마을에서는 농사도 짓고 새마을지도자, 이장, 작목반 등 지난 20여년 마을사람으로 동화되어 살면서 각종 정부의 마을공동체사업을 직간접적으로 함께했고 ‘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을 따로 만들어 마을공부방, 농촌유학, 마을돌봄(노인복지)도 천천히 느리지만 마을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무진 애를 써왔다.


그럼에도 다시 ‘마을공동체’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혼란스럽고 점점 헷갈리기도 하니 뭔지 모르고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한 건 아닌지 반성도 하게 된다. 20여년이 지났으니 그때랑 지금은 마을공동체에 대한 이미지나 개념이 어쩌면 어떤 측면에서는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도시는 동네로서의 마을이라는 범주에서 아파트가 마을로 진화(?)되어간 현실을 부정할 수 없고, 농촌은 고령화・과소화되어 사회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어려워져 ‘마을’의 기능이 많은 부분 상실되어지기도 했다. 내용적으로는 경쟁, 소비사회에서 함께 잘 사는 ‘공동체’보다는 각자도생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을공동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주민들이 모여 자신들이 속해있는 마을에 관한 일을 주민들 스스로 해결하고 결정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과거 도시든 농촌이든 작은 단위 마을(한 우물물을 함께 이용하는 정도의 범위와 사람들)에서는 대동회, 산신제, 절기별 행사, 마을길 청소, 관혼상제, 품앗이(농사), 생일밥상 등 소박하지만 중요한 일들을 그 마을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꾸려왔더랬다. 내가 살고 있는 농촌마을(행정리 개념)에도 이제는 이런 마을공동체적 삶은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어졌다. 그렇다면 변화된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마을과 공동체는 이제 필요 없어진 것일까? 내 결론을 말하자면 여전히 필요하고 어쩌면 갈수록 개인주의화되어 삭막해져만(세대갈등, 혐오, 묻지마 범죄 등) 가는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하고 다시 재생되어야만 하는 우리시대의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마을공동체라는 단어와 의미 그리고 사람들의 삶속에 녹아있던 그 근본적인 정신과 철학을 지켜내는 가운데 시대의 변화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마을공동체에 대한 수용과 노력이 필요하리라 본다. 

먼저, 마을공동체의 근본 정신과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자. 너무나 당연하고 뻔한 얘기 같지만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마을공동체 정신은 ‘안전한 관계, 응원과 지지의 환대, 서로 돕고 나누고 함께하는 가족’ 같은 것이었다. 마을의 큰 행사 말고 내 유년시절 잔잔한 마을공동체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집의 문을 잠그지 않아도, 내 아이가 옆집에서 밥을 먹고 와도 걱정하지 않는 일상, 우물가에 모여 슬픔은 토닥이고 기쁨은 함께 나누는 이웃, 명절이면 다 같이 마을길을 청소하고 동네 어르신댁에 아이들을 새배 보내는 부모들, 급전이 필요하면 옆집에서 어렵지 않게 신뢰관계만으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사이, 아이들이 서리를 해도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동네 삼촌 같은 어른들...

몇 살 때였을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아침이 생각난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부모님은 안계셨고 쪽지가 하나 놓여있었다. “일어나면 씻고 가방 챙겨서 ○○아저씨네로 와라.” 형과 나는 학교에 늦을까 허둥지둥 씻고 나서 엄마가 말씀하신 저 아래 ○○아저씨네로 달려갔다. 방문 앞에는 많은 신발들이 보였고 방문을 열자 시끌벅적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듯 했다. 그 집 아저씨의 생신이었던 거다. 둘러보니 저기 한쪽에 동네 또래의 아이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우리들의 상이 따로 마련되었던 아침 밥상이었다. 도시락까지 그 집에서 싸서 학교로 갔던 어린 시절 동네 기억이다. 그 때는 몰랐지만 그 날 아침 분명히 그 마을 사람들은 가족이었고, 마을공동체였음을 나이가 들어 깨닫게 되었다. 하나의 평범한 일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날의 그 일상적이었던 아침식사야말로 마을공동체의 근본정신이 삶속에 녹아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지금 이런 장면을 일상으로 회귀시키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지난 20여년 마을생활을 돌이켜보고 각종 사업으로 유도되는 마을공동체의 형태를 보니 내 어린 시절 기억의 마을공동체는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어 가고 있으며 일상적인 생활문화와는 다른 마을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형태로 마을공동체가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아파트 갈등문제(층간소음, 흡연문제, 주차장문제 등)나 농촌지역 과소화문제, 고령화로 인한 마을 돌봄, 쓰레기 악취문제 등 공동체적 문화가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마을의 의제와 과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마을공동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정이나 민간영역에서 접근하는 이유는 언젠가부터 도시든 시골이든 ‘함께 공동으로 하면 일이 안 된다’는 인식을 바꿔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함께 하면 수월하고 즐겁고 결과도 만족스럽다는 공동체적 문화는 사라져간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맞게 마을공동체의 변화와 다양성을 시도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전통적 양태와 형태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마을을, 공동체를 체감하는 경험들은 매우 소중하다. 

전라남도 영광군 묘량면이라는 시골마을에는 ‘여민동락’이라는 공동체가 있다. 여러 가지 마을일을 벌이고 있는데 그 가운데 ‘동락점빵’이라는 골목골목 집집마다 다니며 각종 부식과 생필품을 파는 움직이는 가게(차량)가 있다. 읍내로 장을 보러가기 힘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 마을의 공동체가 협동조합까지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사례다. 그러면서 동네어르신들 말벗도 해드리고 안부도 묻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망을 촘촘히 만들어낸 기분 좋은 모습이다. 

작년 춘천에서 우리센터와 중간조직들 그리고 시내의 카페(26곳) 사장님들이 시도한 ‘맡겨놓은 카페’도 참고할만한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용돈이 부족한 청소년들은 비는 시간, 친구들과 만나 수다 떠는 시간에 어디로 갈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더랬다. 편하게 갈수 있고 용돈에 구애를 받지 않아야하고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편안한 곳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를 춘천시민들이 참여하여 ‘우리의 아이들로 함께 보살피자’라는 공동체적 방식으로 풀어낼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이탈리아의 카페소스페소 캠페인을 접목해 보자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춘천시민들이 시내의 카페에 갈 때 지역의 청소년들을 위해 한잔의 음료 값을 먼저 지불해 놓으면 청소년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얼굴도 이름도 서로 모르지만 춘천의 어른시민들과 청소년들은 만나고 관계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예전부터 형성되어온 마을공동체성의 근본정신과 철학을 이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개방성과 다양성으로 다시 회복시켜보자. 그래도 세상이 아무리 삭막한 경쟁시대로 흘러가고 있다 하더라도 마을이 안전하고 사람 살맛나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나 말이다. 디지털, 자동화 시대를 넘어 AI가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에 모든 이가 반길 수만은 없을 것이다. 알 수 없는 불안하고 두려운 미래에 어쩌면 ‘마을공동체’가 행복한 삶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